[한국사 공부]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 정몽주 vs 정도전

입력 2015-06-05 17:37  

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20)

(18) 충선왕을 따라 중국 유람한 유학자 이제현
(19) 공민왕, 반원 자주 개혁을 내걸다
(21) 14세기 수월관음도, 고려 회화의 백미
(22) 조선의 기틀을 확립한 태종




때로는 책 한 권이 역사를 바꾸기도 합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 나폴레옹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닳도록 보던 콜럼버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직접 대항해를 나섭니다. 14세기 후반 고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다섯 살 위인 정몽주가 건네준 책 『맹자』를 읽고 감명을 받은 정도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꿉니다. 정도전은 신흥 무인세력의 수장이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지요.

같은 듯 다른 두 길, 개혁과 혁명

정도전은 『맹자』를 읽기 전까지는 평범한 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강한 정치적 성향도 없었으며 백성은 어리석?복종의 대상이라고만 여겼지요.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변하게 됩니다. 『맹자』 속 백성은 곧 하늘의 뜻이자 도(道)였으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임금을 버린다는 글귀는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자 깨달음의 언어였지요. 그런데 고려 말 현실속의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의 횡포에 자신의 토지를 억울하게 빼앗기고 가난의 고통 속에 살고 있었지요. 정몽주와 그는 이런 잘못된 국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발벗고 나섭니다. 성리학자들을 모아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유교적 이상 사회를 지향합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사람답게 사는 것, 즉 인의예지가 지켜지는 사회,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 그리고 충효를 통해 국가 기강이 바로 선 사회를 만들고 싶어했지요.

친원파이자 대농장을 소유한 기득권층의 반발에 이들은 곧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들을 도와줄 무인세력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였지요. 이제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기존 세력을 숙청하며 고려를 되살리는 길에 나섭니다.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것까지도 이들은 함께하지요. 그것이 『맹자』에서 배운 민심이고 천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둘은 확연하게 갈라지게 됩니다. 바로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저항하는 세력 사이에서 개혁을 통해 사회적 안정을 이룰 것이냐 아니면 아예 완전히 새 판을 짤 새 국가를 만들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부딪친 것입니다.

덧셈의 정치와 뺄셈의 정치 사이에서

정몽주는 권문세족에 대한 숙청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 심지어 왕까지 두 번이나 교체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깁니다. 또한 백성 누구나 잘 먹고 잘사는 문제, 즉 토지 문제에서도 권문세족의 불법적 농장을 혁파하여 원래대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후에는 백성들의 실질적 고통인 세금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지요. 살아남은 일부 권문세족이나 또는 신진사대부 중 대토지 소유자도 인정할 수 있는, 그래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려를 되살리는 방식을 택하였지요. 반면 정도전은 백성의 수와 토지를 계산해 하늘의 뜻을 대변하는 백성을 위해 그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는 이른바 ‘계민수전(計民授田)’ 방식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는 권문세족이건 신진사대부건 가리지 않고 그들보다는 백성을 우선으로 하는 토지 재분배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고려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 방식을 전면 수용할 수 있는 새 국가를 원하였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스승이든 선배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맹자』에 나오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토지 제도 방식인 정전제(井田制)를 실천할 수 있는 새 국가의 수립이었지요.

단심가의 정몽주, 조선을 디자인한 정도전

같은 『맹자』를 보고 우왕과 창왕의 폐위까지 함께하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이 결정적으로 갈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조선 건국 이후의 정치제도와 통치방식은 상당수 정몽주가 기존에 주장했던 것입니다. 조선의 친명정책, 성리학의 이념, 재상 중심의 통치, 과전법의 이행 등 일부 변경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미 정몽주가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조선을 건국해야 했을까요.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정도전이 고려 말 9년여의 유배생활에서 당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함께했기에 좀 더 급진적인 정치적 지향을 하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반대로 보면 정몽주는 성리학자답게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최대치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단심가’로 잘 알려진 그의 고려에 대한 ‘충심’을 곰곰이 되짚어볼 점도 있지요.

1392년 4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던 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3개월 뒤, 조선이 건국됩니다. 정도전은 유교 경전 『시경』에 나오는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따온 글귀로 경복궁의 이름을 짓습니다. “군자여, 만년토록 복을 누리소서”라는 뜻이지요. 유교 국가 조선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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